사전적인 뜻으로는
equivalent [ikwívlnt] 【L 「같은 가치의」의 뜻에서】 a.
1 동등한, 같은 가치[양]의; (말표현이) 동의의 ((to)); 【화학】 당량(當量)의, 등가(等價)의; 【수학】 등적(等積)의, 같은 값의
2 상당[대응]하는, 맞먹는 ((to))
n.
1 동등물, 등가[등량]물; 상당하는 것
2 【문법】 상당 어구, 동의어
3 【물리화학】 등량, 당량
4 【수학】 동적(同積), 동치(同値)
☞ equivalence n.
사진에서의 이퀴벌런트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개발해낸 용어로서, 등가치 등가물 또는 동등한 등의 듯으로 번역된다. 이는 피사체가 원래의 의미를 뛰어넘어 새로운 의미나 이미지를 지니게 되는 사진을 가리킨다. 즉 "ㄱ"이라는 피사체가 "ㄱ"의 의미를 지닌체 "ㄴ"이라는 대등한 가치의 다른 이미지로 바뀌는 것으로, 사진가 "버먼트 뉴홀"은 다음과 같이 이 뜻을 정리해 놓았다.
- 피사체를 알아 볼 수는 있어도 그것은 다만 츨발점에 불과한데, 이는 사진가의 시각에 의해 뜻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
피사체는 사진가의 생각이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요, 출발점 으로서, 최종적인 사진에서는 피사체 자체의 존재감보다는 새로운 의미가 더 부각된다. 물론 새로운 의미가 더 부각된다고 해서, 피사체의 근본적인 의미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피사체 위의 새로운 의미가 오버랩되어 별개의 이미지를 창출할 뿐이다. 현실적 사물의 외족 이미지와 작가의 내적 이미지라고 하는 이원적 욕구가 동시에 충족될 수 있는 것은 사진밖에는 없다. 그것이 "이퀴벌런트"다.
구름 사진과 Equivalent
알프레드 스티글리츠(1864~1946)가 처음 Equivalent란 화두를 꺼내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가 거의 환갑이 다 된 1922년이었다. 그는 청년시절에 외국에서 구름의 무한한 변용(變容)에 매료되어 그것을 찍고 싶었으나 당시의 기술로는 거의 불가능하여 하지 못하였었다. 그러다가 1922년에 본격적으로 구름을 찍기 시작하였다.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오묘한 형상에 매료되기도 하였거니와 구름과 다른 사물(특히 나무)과의 관계에 흥미를 느꼈다. 독일의 문호 헤르만 헷세가 변화무쌍한 구름의 모습을 보고 넋을 잃었던 일과 맥을 같이한다. 이 무렵 스티글리츠는 구름 사진 찍기에 몰두하여 제법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구름 사진들을 ‘하늘의 노래’‘나무의 노래’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나의 구름 사진들은 나의 심오한 인생역정(人生歷程)의 반영물(反映物)이다”라고 말했다. 참고로 영문 그대로 옮겨보자.
My Cloud Photographs are equivalents of my most profound life experience, my basic philosophy of life.
이 말에서 이퀴벌런트란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퀴벌런트란 단어를 등가(等價)라 번역하는데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구름 사진이 내 인생철학과 등가다” 하면 어쩐지 어색하다. Equivalent란 말의 다른 뜻에는 상당물(相堂物)이 있다.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이란 뜻이다. 예컨대 형용사 상당어구를 저들은 adjective equivalent라 쓴다. 형용사 그 자체는 아니지만 단어 몇 개가 모여 형용사 구실을 한다는 뜻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이퀴벌런트를 같은 구실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으며, 나아가 좀더 부드럽게 의역하여 반영물이라 한 것이다.
조만간 그는 그의 모든 사진들이 이퀴벌런트라 주장하였고, 모든 예술은 그 예술가의 심오한 인생 체험의 반영물이라 주창하였다. 그런가 하면 또 이런 말도 남겼다. “나의 사진들은 세상의 혼돈을 반영한 것이며, 그 혼돈과 나와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면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봅시다.
회화와 같이 아름다운 피그멘트 인화법(Pigment 印畵法 : 그림 용구를 이용한 인화법)이나 네가(Nega)의 극단적인 수정, 연초점(軟焦點)의 촬영 등 20세기 초기에는 사진에도 회화적 기법이 성행했다. 사진에서의 이런 회화적 수법을 부정하고 사진의 독자적인 기술로 있는 그대로를 찍겠다는 사진 본래의 표현을 행동으로 보여준 운동과 작품을 사진 분리파(Photo - Secession Group)라 한다. 이런 사진 분리파 운동을 추진한 사람이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였다.
스티글리츠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했지만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다시 유럽으로 이주한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예술에 대해서도 매우 관심이 많았다.
스티글리츠는 처음엔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전기기계공학을 전공했으나 2년 후 베를린 대학으로 전학해 사진화학을 전공하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진활동을 시작한 것은 1887년 무렵이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찍은 사진이 런던에서 공모한 현상 공모전에 일등으로 당선된 이후, 이로부터 3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그는 무려 150회에 걸쳐 입상 할 만큼 사진에 몰두했다. 사진은 그의 전부였고 한평생을 바칠 보람이 된 것이다.
1890년, 스티글리츠는 유럽으로 건너간 지 9년만에 다시 미국 땅을 밟았다. 그는 사진 찍는 일에 열중하는 한편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클럽을 지도하는 데도 부지런했다. 스티글리츠가 미국 사진계의 중심 인물로 떠오른 것은 1902년 사진분리파 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였다.
사진분리파 운동은 20세기의 분수령을 넘어서는 역사적인 운동이다. 사진 분리파(Photo - Secession Group)란 그가 새로 조직한 사진클럽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 사진 클럽의 이름을 넘어서서 새로운 사진의 기치를 내건 선언으로서, 낡은 사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나선 유파의 의미였다.
사진분리파 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그는 1903년『카메라 워크(Camera Work)』를 창간했고, 1905년에는 '291'이라는 화랑을 열었다. 『카메라 워크』는 1917년까지 간행되었으며, '291'은 사진 분리파의 발표 무대에 그치지 않고 전위적인 미술가들에게도 문을 열어 놓았다. 그럼으로써 '291'은 현대 사진의 산실일 뿐만 아니라 미국 현대 미술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스티글리츠는 화랑을 통해 신인들의 발굴과 이들의 뒷받침에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 밑에서 자라난 새 세대들에 의해 현대 사진의 아버지로 받들어지게 되었다.
스티글리츠가 사진가로서 또한 사진 운동가로서 사진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미술사에서 세잔느가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큰 것이다. 왜냐하면, 19세기 사진의 역사가 그에게서 일단 끝나고 20세기 사진의 역사가 새롭게 태동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전환은 다름 아닌 스트레이트 포토(Straight Photography:순수사진) 주창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진분리파 운동이 내건 '스트레이트 포토'란 일찍이 다게르(L. J. Mande Daguerr)가 사진을 발명할 당시에 신봉되었던 순수한 기계적 기록성을 되찾자는 것이다. 즉 렌즈가 본래 갖고 있는 정확하고 정밀한 광학적인 기능을 사진의 기본으로 다시 회복하지는 것이었다. 스티글리츠의 이러한 주장은 얼핏 보기에 단순하고 대수롭지 않게 들리지만 이것이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는 새로운 지표가 되었다.
1839년 사진이 발명된 이래로 사진의 역사적인 흐름은 크게 두 갈래로 이어져왔다. 하나는 실용적인 목적으로서의 기록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적인 표현으로서의 예술사진이다. 실용적인 기록사진은 무엇보다도 사진의 기계적 기록성에 바탕을 두고 대상의 충실한 재현에 힘썼고, 이와는 반대로 예술사진은 대상의 충실한 재현보다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것에 치중하였다. 그러므로 기계적인 기록성은 기록사진에 있어서 절대적인 기본원리지만, 예술사진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여기에서 기록사진과 예술사진은 서로 별개의 것으로 나누어져 세월이 흐를수록 그 간격이 벌어지게 되었다. 기록사진은 다만 실용적인 목적을 이루는 데 만족했고, 예술사진은 사진의 특성에는 무관심한 채 예술적인 표현을 뒤쫓는 데만 치중했다.
스티글리츠의 순수 사진 운동의 의의는 이렇게 상반되는 두 갈래 사진의 흐름을 하나로 통합하여 변증법적인 새로운 경지를 이룩한 것에 있다. 그가 기치를 든 순수 사진 운동은 사진의 예술성을 수립하려는 것이었지만, 막상 그가 내세운 순수 사진의 입장은 정반대로 기록사진의 노선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 동안 예술성을 추구해온 모든 예술가들이 제약과 굴레의 한계라고 결정을 내린 사진의 기계적 기록성이, 오히려 사진의 독자적인 예술성이 자리잡을 터전임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가 사진에 발을 들여놓은 188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는 살롱 사진의 전성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그 동안 까맣게 잊혀졌던 사진의 기본원리 위에다 사진의 독자적인 예술성을 추구할 것을 정면으로 주장한 것이다. 그러면 이제까지의 모든 사진들이 예술성을 추구함에 있어서 정면으로 마주쳤던 기계적 기록성의 한계를 그는 어떻게 보았는가. 스티글리츠는 사진 예술의 기본 미학을 사실주의 바로 그것이라고 간파한 것이다.
'사실주의'의 예술적 정의는 "어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재현해도 훌륭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주의·주장"이다. 이러한 사실주의의 자각은 자연과학의 발달에서 말미암은 시대적 변화로 보아야 될 것이다. 사실주의는 19세기 중반부터 차츰 고조되어온 세계적인 추세로, 자연과학적인 입장에서 대상에 새롭게 접근하려는 예술의 새로운 시도였다.
스티글리츠는 사진이야말로 사실주의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예술 형식임을 간파한 것이다. 그가 주창한 '순수사진'이란 사진의 과학적 속성이 예술적 표현에 방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자연과학적인 입장에서 대상을 새롭게 발견하려는 예술적인 새로운 조직의 첨단임을 주장한 것이다. 이로써 그동안 혼미를 거듭해온 예술 사진의 문제는 일단락 지어지고 사진은 예술로서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사실주의의 입장을 더욱 공고히 하고 내면화하기 위한 시도로서 클로즈업을 통한 정물적 대상 파악을 추구하였다. 클로즈업은 대상에 대한 극단적인 접근이며 정밀묘사이므로, 이러한 정물적 처리는 사실주의의 확대이며 강화인 동시에 부분을 통한 전체의 암시이다. 그가 후기로 넘어와서 클로즈업 수법을 많이 동원한 까닭은, 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강조함으로써 화면 밖으로 밀려난 전체를 암시하여 사진의 상징성을 살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가 20세기 현대 사진에 주춧돌을 놓은 것은 사진의 눈을 통해 현실을 현실 그대로 보는 동시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까지 드러내고자 한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자각은 오랫동안 제 길을 못 찾고 갈팡질팡하고 있던 사진 예술을 본 궤도에 올려놓게 된 것이다.
스티글리츠의 대표작은 '삼등 선실', '종점', '5번가의 겨울', '이퀴벌런트(Equivalent)' 시리즈나 인물 및 건축 사진들이 있다. 1924년 미국 보스턴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매입함으로써 그의 사진에 대한 공로와 작품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보스턴미술관의 사진 매입은 미국 미술관의 사진 콜렉션으로는 최초의 것이다.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
1910년대부터 미국에서는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 Straight Photography가 유행했습니다.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란 말 그대로 사진에 어떤 조작도 가하지 않은 다시 말해 인위적이지 않은 사진을 말합니다. 픽토리얼리즘 사진과는 아주 대비되는 사진적 경향이라 할 수 있지요.
근대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사진 경향이라 할 수 있는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은 미국의 사진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Alfred Stieglitz입니다.
그의 사진 철학은 사진이 그 자체의 독특하고 확고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다른 예술과 혼동되거나 반대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존재가치가 있는 순수예술이 되었음을 최초로 입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그의 사진 자체뿐만 아니라 출판업자로서, 화랑 주인으로서 그리고 전람회 조직자로서의 정력적인 활동을 통해 크게 증대될 수 있었습니다.
1890년대 사진가의 위치는 사진의 상업적ㆍ산업적 확장으로 인해 존재 가치까지 위협받고 있었고, 스티글리츠는 에머슨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술사진의 위기를 승리로 극복해야 한다는 당초의 생각을 확고하게 지키고 있었으며, 사진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는 몇몇 사람들이 그를 도왔지요. (스티글리츠가 사진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된 계기가 1887년 런던의 ‘아마추어 포토그래피'가 공모한 사진 콘테스트에서 <A Good Joke>가 특선작 중의 하나로 선정되었던 일입니다. 이때 스티글리츠의 작품을 선정한 사람이 바로 에머슨이었답니다.)
스티글리츠는 인위적이지 않은 스트레이트한 사진을 요구했습니다. 1890년대에 핸드 카메라를 가지고 수정을 가하지 않은 채로 그가 만든 일련의 뉴욕 사진들은, 촬영 후에 어떠한 조작이 없이도 자신이 예측하고 원했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창조력과 상상력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천재성은 곧바로 미국과 유럽에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스티글리츠의 작품 철학은 흔히 ‘등가성 미학 Equivalent'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눈앞에 어떤 상황이 펼쳐져 있을 때 사진은 그 상황 전체를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 만큼만 찌게 된다는 것이지요. 등가성 미학이란 이렇게 사진에 찍힌 대상과 그 사진이 상징하고 있는 전체적인 느낌은 일대일로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유럽 유학을 다녀온 스티글리츠가 미국에서 눈에 띄는 사진작품들을 만들어내자, 당시의 다른 사진가들은 스티글리츠의 사진이 좋은 이유는 찍은 대상을 좋아서지 스티글리츠가 사진을 잘 찍어서가 아니라고 반박했습니다. 이에 대해 스티글리츠는 그렇다면 특별한 대상이 아니라 누구나 볼 수 있는 하늘의 구름을 사진으로 찍어보겠다고 선언했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그의 <구름>사진 시리즈는 등가성 미학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예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사진가가 한 장의 사진으로 하나의 프레임으로서 대상을 고립시켜 냈고, 그 고립시켜 내서 나타내는 분위기와 실제 사진에 찍혀진 구체적인 대상들 사이에는 일대일로 등가를 이룬다는 것이 등가성 미학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으로 이민 오는 사람들이 타는 이민선의 삼등선실 풍경에서도, 자세히 보면 사람들 하나하나는 정말 보잘것없고 그냥 이민 오는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내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것이지요
스티글리츠는 근대사진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특히 스티글리츠는 화랑 ‘291'을 만들었는데, 이 화랑을 통해 스티글리츠는 유럽의 가장 전위적인 예술 작품들을 소개했으며, 당시 미국 내의 새로운 예술적 시도들은 대부분 이 화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화랑 ‘291'은 미국적 예술의 본산지였다고 미국 예술사에 기록되고 있지요, 한편 그는 당시 그가 조직했던 사진가 그룹 ‘사진분리파'의 기관지인 『카메라 워크 Camera Work』를 통해 자신의 사진관을 전파하고 폴 스트랜드 Paul Strand 같은 젊은 신예 사진가를 발굴해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 운동을 주도해 가기도 했습니다.